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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책 읽기

미스터 프레지던트

문재인 정부 청와대 의전비서관이었던 탁현민 작가님의 책입니다. 에피소드별 제목 옆에 QR코드가 있어 스캔하면 당시 영상을 볼 수 있구요, 중간 중간 관련 비공개 사진도 있어 좋았습니다.

청와대에서 진행한 모든 행사는 정치의 범주 안에 있는 일인데, 쇼한다고 비난하고 폄하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해요. 쇼한다는 사람 중 쇼하지 않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는 작가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쇼한다고 비난하는 사람들과 우리의 차이는 딱 한 가지밖에 없다. 누가 잘하고 누가 못하는가? (프롤로그)

 

2014년 세월호 구조 과정을 다룬 다큐 '다이빙벨' 상영 문제로 정치적 탄압을 받았던 부산국제영화제. 참석하신 대통령께서는 과거에 대한 위로와 함께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고 함께 즐기겠다"고 말씀하셨어요. 이후 배우, 학생, 관계자, 공무원들과 함께 인근 중국집에서 오찬을 했답니다. 어색함, 불편함, 즐거움이 묘하게 뒤섞인 많은 사람들. 사전 섭외도 없었고 인원도 많았던 관계로 주문이 짜장면으로 통일되는 즈음.

그렇게 자연스럽게 짜장면으로 주문을 마치려는 순간, 갑자기 대통령이 손을 번쩍 드시면서 다급하게 말씀하셨다. "아니, 아니 난 해물짬뽕....(도종환 장관을 바라보며) 아니 장관님이 먼저 짜장면 이래 버리면 어떡해요. 그리고 뭐 탕수육이나 이런 것도 좀 주시는 거죠? 하하하" (66쪽)

 

UAE 공식 방문 마지막날, 격려차 방문하신 아크부대(아크는 형제라는 뜻). 이미 고생이 많은 장병들을 위해 대통령이 갔다고 고생을 더하게 하지 않으려 모든 일정을 간소하게 하셨어요. 군 복무를 해 본 사람들은 어떤 상황인지 다 아실 듯... 대통령은 장병들이 먹고 싶은 음식과 체력 단련용 운동기구를 전용기에 싣고 가셨구요, 파병이 확정되자 결혼을 미루고 나온 장교를 위해 '태양의 후예'라는 작전명으로 약혼녀를 공수해 써프라이즈를 해 주시면서 장병들을 격려하셨어요.

나는 그냥 대통령이 아니라 공수 130기 특전사 출신 대통령입니다. 부대 편히 쉬어, 대통령 명령입니다 (80쪽)

윤석열 정부 2022년 국군의 날 행사, 사열한 장병들에게 "부대 열중 쉬어"라는 명령도 못하는 건 군 면제자여서 일까요? 사람에 대한 배려가 없어서일까요? 2023년초 똑같이 UAE아크부대를 방문한 자리에서 파병 장병들을 앞에 두고 "이란은 우리의 적"이라고 한 말은 그야말로 외교와 국가브랜드 폭망은 물론 세계사의 퇴보를 걱정하게 했죠...

 

2017년 지적장애를 가진 자녀의 학부모님들이 특수학교 예정 부지인 서울 강서구 인근 주민들에게 무릎 꿇고 읍소하던 뉴스가 기억나요. 혐오시설이라며 한방병원을 짓자고 하는 동네 주민들. 같은 영장류라는 생물학적 분류를 포기하고 싶은 충동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2018년 '발달 장애인 평생 케어 종합 대책'에서 대통령은 특수학교 설립을 위해 학부모들이 무릎을 꿇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하셨죠. 그후, 규모나 형식면에서 대통령이 참석할 성격의 행사가 아니었던 공주대 부설 특수학교 기공식에 참석하셨어요. 국가의 역할은 소외계층을 돌보는 것이라는 말씀, 감동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이유있는 반대를 뒤로하고 고 이예람 중사 빈소를 직접 조문한 대통령은 아무 말없이 고인의 부모님 손을 잡고 한참을 계셨어요. 이후, 국가인권위원회 20주년 기념식장 앞에서 시위 중인 고 이예람 중사 유족을 다시 만납니다. 이 중사 어머니는 이 중사 사진을 대통령께 보여드렸고, 대통령은 그저 경청하실 뿐이었습니다.

옆에서 본 대통령의 일이란 권한의 크기보다 책임의 크기가 더 컸다. 또한 대통령의 일이란 지금 바로, 여기서, 확실하고 분명하게 할 수 있는 것보다는 천천히 확인하여, 여러가지를 종합적으로 처리해야 하는 일들이 더 많았다. 대통령은 결과를 명령할 수 없다. 대통령은 과정만 명령할 수 있다. 그러나 대통령이 명령한 과정을 결과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그 명령의 결과가 생각과 다를 때 깊은 상처를 받는다. 대통령 앞까지 나서야 했던 유가족의 서러운 마음과, 그 마음을 잘 알지만 결과를 명령할 수 없는 대통령의 처지, 그 옆에서 우리는 그저 무력했다 (138쪽)

 

국가 기념식과 정부 행사를 기획하고 진행한 작가님의 직업적 탁월함을 엿볼 수도 있습니다. 많은 국가 기념식의 참뜻이 국민에게 잘 전달되지 않죠. 어떻게 보면 매년 돌아오는 명절보다도 못한 경우가 많아요. 국경일은 그저 하루 쉬는 날일 뿐인게 사실입니다.

국가 기념식의 첫 번째 과제는 '그날'의 의미를 잊지 않도록 하는 것에 있다. 의미를 잊지 않기 위해서는 그날에 담긴 이야기가 무엇인지 찾아서 국민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이야기에 공감하는 국민이 많을수록 그날의 의미는 잊히지 않고 기억되며 살아 숨 쉬게 된다 (154쪽)

문재인 정부 기념식이 이전과 많이 다르다는 말을 종종 들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 5년간 국가 기념식은 새로울 게 하나도 없었다. 새로운 것이 아니라 처음 기념식이 만들어진 이유와, 그날의 감격과, 그날의 슬픔과, 그날의 감정을 복원하려 했을 뿐이다. 그것이 전부였다 (162쪽)

 

2020년 6·10 민주항쟁 기념식은 박종철 열사가 돌아가셨던 남영동 대분공실에서 열렸어요. 이날 국민의례에서는 6·10 민주항쟁 사진에서 당시 태극기를 펼쳐 들고 있던 청년을 수소문해서 모셨어요. 20대 청년에서 50대 장년이 되신 두 분이 국가 폭력의 상징과도 같은 대공분실 옥상에서 태극기를 펼쳐 들었습니다. 훈장 수여식의 보조 업무도 국방부 의장대가 아닌 경찰 의장대에게 부탁한 것도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의미있는 변화와 존중의 디테일이 아닐까요?!

6·10 민주항쟁 기념식 제목을 <꽃이 피었다>로 정했다. 그 서슬 퍼런 시절 절절한 분노에도 꽃을 들고 나선 사람들의 마음을 기리고 싶었다. 결국 그 꽃들이 모여 한 시대를 바꾸었고, 이 처절한 공간에도 이제 꽃이 피어난다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213쪽)

 

청년의 날이 처음 제정된 2020년. 전례가 없는 행사를 코로나19가 대유행하던 시기에 해야 하여 부담이 많았다고 하네요. 긴 시간 토론과 조사 끝에 BTS를 메신저로 정했어요. 하지만 BTS가 오늘날 청년의 현실을 반영할 수 있는가라는 우려도 팽팽했다고 하는데요. 당시로선 더 나은 대안이 없어 일단 가능한지를 먼저 타진했고, 돌아온 BTS의 대답에 확신을 얻었다고 해요.

우리의 성공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과정을 이야기하면 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정답을 찾아서 온 것이 아니라 정답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했을 뿐이거든요. 그 노력과 과정에 대해 멤버들의 생각을 정리해 볼까 합니다 (221쪽)

여기까지 읽고 책을 잠시 덮었습니다. 나의 청춘도 그때는 저렇게 아름다웠다고 말할 수 있을까...

 

코로나19는 정상회담의 방식도 바꾸었죠. 2020년에는 G20, 한-아세안, APEC이 화상회의로 진행되었어요. 최신 기술과 디자인으로 구현한 우리만의 화상회의 시스템은 각국으로부터 문의와 칭찬을 받았다고 해요. 하지만 이 첨단 화상회의에서 다른 나라들이 정말 높게 평가한 것은 따로 있었다는데요.

그것은 대통령의 '태도'였다. 대통령은 2,3시간을 꼬박 넘기는 화상회의 내내 화장실 한 번 가지 않고 자리를 지키는 거의 유일한 정상이었다. 한번은 너무 지치신 것 같아 회의 중에 조용히 다가가 "잠시 화장실이라도 다녀오시죠. 대통령님" 했다가 "그냥 네 자리로 돌아가라"는 핀잔을 듣기도 했다. 첨단의 시대 최첨단 화상회의에서,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던 장면은 멋진 디스플레이나 놀라운 기술이 아니었다 그것은 '상대를 배려하며 자리를 지키고 앉아있는 태도'였다. 우리가 정말 잃어버린 것들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익숙했던 것들에 대해서, 그리운 것들에 대해서 (371쪽)

https://www.youtube.com/watch?v=9SmQOZWNyWE 

2021년 유엔총회에서 대한민국 대통령이 전 세계를 대표해 유엔 기조 연설을 하고, 대한민국 아티스트가 유엔을 배경으로 뮤직 비디오와 메세지를 발표한 역사적 장면이 있었습니다. 백범 프로젝트라는 가제로 오랜 시간 수많은 사람들이 노력한 결과였다고 해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나라. "We don't need permission to dance"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 백범 김구 문화국가론 중에서 - (385쪽)

 

청와대 폐쇄 공식화 이후, 문재인 대통령 임기 마지막 날 자정에 청와대 개방을 한 윤석열 정부. 그들의 단순무식과격 3종 세트는 취임 첫날부터 시작된 것이네요. 아무튼, 작가님은 임기 마지막날 '서프라이즈 퇴임 행사'를 마지막으로 기획하셨어요.

청와대 행정관들과 행정요원 중심으로 준비했다. 장관이나 실장이나 비서관들은 한 번씩은 대통령과 퇴임 인사를 나눌 기회가 있었지만 이들은 그런 기회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노력과 수고에 감사드리고 싶었다 (431쪽)

내용이 너무 길어지는 것 같아 옮기지는 않지만 당일 신동호 연설비서관이 쓰고 읽은 글도 참 좋았습니다.

"오늘 이렇게 우리가 모일 수 있어서 참 좋습니다. 밖에서 누가 뭐라고 하든, 오늘 이 자리에서처럼, 우리가 우리 스스로 해온 일들에 대해 자부심을 가질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그걸로 충분합니다. 우리 모두 함께 일한 것이 영광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으로 나도 여러분도 다 보상받은 겁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435쪽)

 

퇴장 음악 <미스터 프레지던트>가 흘러나왔다. 나는 오랫동안, 아주 오랫동안 준비했던 마지막 멘트를 했다.

"이제 대한민국 대통령께서 퇴장하시겠습니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환송해 주시기 바랍니다" (436쪽)

 

감동은 대상에 대한 애정과 디테일이 만났을 때 가능합니다. 일이든, 사람이든, 동식물이든 그들에 대한 깊은 애정,

거기에 어떤 거대한 철학, 종교, 지식, 이념, 돈 이런 것들이 반드시 필요하거나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결국 추억이 되고 위로가 되는 것은 사소한 것들 즉, 진심이 담긴 말과 눈빛, 잊고 있었고 기대 조차 없던 온정, 배려, 존중 아닐까요. 이렇게 남은 감동 때문에 따뜻하고 추억하고 그리워하는 것이겠죠.

책을 읽는 내내 약자에 대한 국가의 배려, 정부 행사 면면에 부여한 깊은 의미로 마음이 웅장해지고 훈훈해지고 했습니다.

 

돌아보니... 저는 감동 주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아직도 그런 사람이고 싶습니다.

하지만 저는 약자와 타인을 위하는 척 하는, 이기적 이타심 뿐이었습니다. 결국, 오랜 시간 서운함과 아쉬움, 박탈감을 진하게 느껴야했죠.

그땐 몰랐습니다. 깊은 이해와 진정한 존중으로 그들을 대했다면 그것 자체가 존재 의미이고 보상이라는 것을.

그래서 이제는 잊지 않을 겁니다.

 

날 것의 역겹고 천박함을 매일 마주하는 지금.

온정과 존중, 감동과 품격이 그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