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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책 읽기

너 없이 어찌 내게 향기 있으랴

6월말부터 아파트 입구에 접시꽃이 피었습니다. 아침 저녁으로 잘 다녀오라고 잘 다녀왔냐고 안부를 묻는 것 같았어요. 7월 장마가 한바탕 폭우를 쏟은 후에도 여전한 모습. 가만히 들여다 보니 누군가 부러진 우산대와 철사로 꽃대를 지지해 놓았어요. 그 누군가에게 감사한 마음입니다. 한달 이상 출퇴근 길 인사를 하다보니 '접시꽃 당신'을 쓰신 도종환 님이 생각났습니다. 비교적 오래 전인 2012년 산방 생활을 하며 쓰신 책을 찾아 읽었어요.

꽃은 꽃 아닌 것들의 힘으로 피어납니다. 꽃을 꽃으로 존재하게 하는 것들은 꽃 아닌 것들입니다. 햇빛도 물도 흙도 꽃이 아닙니다. 그러나 꽃 한 송이는 꽃 아닌 것들과 기운을 주고 받고 소통하면서 꽃으로 살아갑니다 (29쪽)

우리도 스스로가 아닌 것들의 도움으로 존재합니다. 대자연의 공평함과 부모님, 가족, 친구, 동료의 도움을 받아 살고 있어요. 그러므로 우리도 나와 무관해 보이는 사람들과 우리를 둘러싼 자연에게 조금은 돌려주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재물이 없어도 마음으로 할 수 있는 일곱가지 보시가 있어요. '무재칠시'라고 하는데요. 화안시(웃는 얼굴), 안시(따뜻한 눈빛), 언시(친절한 말), 심시(고운 마음), 신시(남을 돕는 행동), 상좌시(좋은 자리를 양보하는 것), 방사시(쉴 공간을 내어주는 것)인데요, 돈이 없어도 누구나 할 수 있는 보시입니다.

 

나이 들수록 향기롭게 살아야 합니다. 용서와 이해와 관용과 부드러움과 아량은 은은한 향기를 지닌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은은한 향기를 지니고 살아야 아름답게 나이 들어 갈 수 있습니다 (44쪽)

요즘 저는 사람들을 거의 만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누군가를 만난다면, 편안한 사람이 좋아요. 불편한 이야기를 이어 가야 하는 자리보다 편안한 이야기를 할 수 있고, 굳이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사람을 만나는 것이 좋습니다. 시간 계획을 잡을 때에도 빡빡한 일정보다 빈 시간이 있는 일정이 좋아요. 헐렁해 보이고 별 생각이 없어 보일지언정, 담담하게 저 스스로가 끌어가는 삶을 살고 싶어요.

 

저녁 시간 3호선 전철. 작가님은 덩치 큰 옆자리 남자로 인한 불편함, 시끄럽게 통화하는 앞자리 여자를 보며 피로감이 들었다고 해요. 그런데 장애인의 휠체어가 전철문에 끼는 사고가 나자, 너나 할 것 없이 힘을 모아 사고를 수습했다는데요.

앞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아가씨가 못마땅하다는 것도 내 편견입니다. 옆에 앉은 뚱뚱한 사람이 불편하다는 것도 나만 생각하는 주관적인 판단입니다. 알고 보면 좋은 사람들입니다. 고속터미널역에서 내리며 나는 옆 자리에 앉은 남자에게 "안녕히 가세요" 하고 인사를 하였습니다. 처음 본 사람이고 이름도 물어보지 않았지만 나는 오늘 타인이란 누구인가에 대해 소중한 걸 배웠습니다 (71쪽)

저는 사람들이 많은 공간을 가급적 피합니다. 근 30년 직장생활 동안 이른 아침에 출근하고 붐비는 퇴근 시간을 피하는 것도 이런 이유가 큽니다. 특히 옆자리 사람을 배려하지 않고 자신만의 편리를 위해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을 보면 울컥 화가 나기도 하는데요... 이제는 그것이 그들의 전부라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그럴만 해서, 그럴 수 밖에 없어서, 그럴 수 있으려니... 기꺼이 제가 조금 불편하게 가 보려구요.

 

지금보다 물질적으로 더 풍요로워지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믿으며 정신없이 살아오는 동안 우리는 너무 끔찍한 세상을 만들어 놓고 말았습니다. 밑도 끝도 없는 적개심과 증오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참으로 무서운 세상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90쪽)

돈과 기득권을 위해 약자를 억압하고 불의를 저지르는 일, 욕망과 분노에 사람의 목숨을 잔혹하게 해치는 일, 언제 어디서 누가 어떻게 사고를 당하고 죽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는 세상, 그러한 현실을 방치하고도 누구 하나 책임지지 않는 나라. 답답하여 외면하고 싶은 현실이지만, 혹한의 추위를 견디고 움 트는 연두처럼, 메마른 나뭇 가지에 피어나는 분홍처럼, 각자의 삶을 견디고 마침내 꽃 피울 수 있길 바랍니다. 폭우에 꽃은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는 말을 기억하며.

 

너 없이 어찌

이 쓸쓸한 시절을 견딜 수 있으랴

너 없이 어찌

이 먼 산길이 가을일 수 있으랴

이렇게 늦게 내게 와

이렇게 오래 꽃으로 있는 너

너 없이 어찌

이 메마르고 지친 땅에 향기 있으랴

 

사랑도 일찍 만나 눈길이 머무는 사랑이 있고, 늦게 만났지만 오래 곁에 향기롭게 남아 있는 사랑이 있습니다. 이른 봄의 매화처럼 찾아오는 사랑이 있고, 늦은 가을의 들국화 같은 사랑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랑을 택하시겠습니까? 나는 들국화를 택하겠습니다. 들국화는 모든 꽃들이 지고 난 빈 들판, 쓸쓸해질 대로 쓸쓸해진 가을 고갯길에 피어 있어서 더 사랑스러운지도 모르겠습니다 (106쪽)

소인배가 어렵게 사는 이유는 그가 하는 일이 어렵거나 힘든 게 아니라 자기가 어렵게 만든다고 해요.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하려니 힘들고, 없는 것을 있는 척하려니 어렵고, 얻을 수 없는 것을 얻으려 하니 괴로운 것이죠.

그릇이 큰 사람은 되는 일은 되게 하고 안 되는 일은 억지로 하지 않으니 그 인생이 쉬울 수밖에 없고, 소인은 안 되는 일을 되게 하려니 그 인생이 어찌 힘들지 않겠는가? 큰 사람은 자기 할 일을 자기 능력만큼 하면서 하늘의 명을 기다릴 따름인데, 소인은 어려운 일을 하면서 요행을 바란다는 것입니다 (98쪽)

 

내가 어떤 자리에 있었는가 보다 어떤 사람으로 있었는지가 더 중요하고, 내가 무엇을 했느냐 보다 어떤 마음으로 했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해요.

외딴 골목에 피어 있어도 매화는 매화입니다. 그 향기는 어디 가지 않습니다. 찬찬히 살펴보면 우리 곁에는 매일매일 박수소리가 쏟아지는 곳에 살지 않아도 곱게 살아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온 세상의 주목을 받지 않아도 곱게 피어 있는 꽃이 있습니다 (266쪽)

기억에 남을 만한 일을 했는지 아닌지도 중요하지만, 정말 사랑하는 마음으로 일을 했는지 물어 봅니다.

 

이준관 시인은 <조그만 마을의 이발사> 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한 바 있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 이발소에서

처음 읽었던 푸시킨의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노여워하지 말라던

허름한 액자에 걸려 있던 시

 

삶은 끝내 가난한 그들을 속이고

나도 속였지만

나는 조그만 마을의 이발사가 되고 싶다

 

다섯 평 좁은 이발소에

난로를 피우고

주전자에 물을 끓이며

수증기 뽀얀 유리창 너머

자작나무처럼 하얀 성탄절의 눈을

기다리겠다

 

모두들 크고 거창한 무엇이 되려고 하는 세상에 이런 작은 소망을 가진 사람이 실제로 있을까요? 나는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가난하지만 성실하게 살아가는 삶도 얼마든지 아름답다는 걸 보여주는 사람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삶이 그대를 속이고 나도 속였지만 노여워하지 않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더 생겨나길 나는 바랍니다 (169쪽)

 

집필 중 전화기를 꺼 놓고 작업을 하다보면 주변의 원성을 듣는다고 해요. 그래도 작가님은 앞으로 더 자주 더 오래 전화기를 꺼 놓겠다고 하세요. 저는 글 쓰는 사람도, 무언가에 몰입해야 하는 사람도 아니지만, 휴대폰과의 거리두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인입니다. 적어도 무가치한 정보로부터 벗어날 수 있고, 여지껏 없어도 무방했던 필요를 느끼지 않아도 되고, 더 이상은 존재가 아닌 소유에 눈 돌리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고립의 한가운데를 향해 걸어 들어가는 시간도 있어야 합니다. 고독한 순간을 향해 몰입하고자 하는 이도 있어야 합니다. 거기서 더 넓은 자유, 더 깊은 사유와 창조를 만나고자 하는 이도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미안하지만 자주 전화기를 끕니다. 참으로 죄송한 일인 줄 알지만 (227쪽)

 

식당에 가면 제가 주로 고르는 메뉴는 1)좋아하시는 걸로, 2)같은 걸로, 3)메뉴판 최상단에 있는 걸로 입니다. 지금것 음식은 제게 연료와 같은 것이었는데요. 작가님의 글을 보면서 앞으로 고치기 위해 노력해 보렵니다.

지난번 몸이 아프고 난 뒤부터 천천히 먹기로 했습니다. 단순히 느리게 먹겠다는 게 아니라 내 앞에 놓인 음식 하나하나를 음미하면서 먹기로 했습니다. 무슨 음식인지 눈으로 바라보고, 빛깔이 얼마나 고운지, 무슨 향을 가졌는지 냄새도 맡아 보고, 맛은 어떤지 천천히 씹으며 맛을 느껴 보기로 했습니다. 밥을 먹는 것 자체가 목적이라면 얼른 먹어치우면 됩니다. 허기를 채우는 것이 목적이라면 허기만 메우면 됩니다. 그러나 인생을 그렇게 살지 않기로 했습니다. 밥을 먹는 시간 자체를 즐길 줄도 알고, 먹는 기쁨도 느낄 줄 알고, 밥을 먹으러 가는 사람들과 함께 보내는 짧은 시간도 의미 있게 보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271쪽)

 

번거롭지 않고 간소하게 사는 삶, 낭비하지 않고 검소한 습관, 허영보다 진솔한 마음, 과시보다 솔직한 모습으로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것만으로 충분히 고마워하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그래서 순간순간 행복을 느끼는 인생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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